26년을 기다리고 다시 4년을 기다렸다!!
클라우드 펀딩으로 만들어진 영화 26년!!!
드디어 보고 왔다. 26년을 기다리고 다시 4년을 기다린 영화... 2008년 제작이 결정되었을 때 보이지 않는 검은 손에 의해서 펀딩이 취소되고, 4년이 지난 올해 클라우드 펀딩의 형식으로 우여곡절 끝에 제작된 영화... 드림팩토리 공장장님 이승환씨가 10억을 펀딩했고 내 후배 민성이가 1억을 펀딩했고, 요즘 재정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나는 겨우 영화 속 ‘그 사람’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금액만을 냈다.
오랜만에 쓰는 영화 리뷰다. 진구의 연기력은 기대 이상 이더라!
리뷰는 네티즌리뷰로 대신한다.
영화속 명대사
대가리(장광): 요즘 젊은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많이 싫어하나봐. 나한테 당해본적도 없으면서
곽진배(진구) : 서울에 담배사러 갑니다.
곽진배(진구): 울 엄니, 한나도 안 변했네. 한나도 안 변했어.
안수호(안석환): 진배야, 담배는샀니?
안수호(안석환): 진배야 너 할라고 하는 일 그것이 참말로 고방법 뿐인지 솔직히 난 잘 모르겄다.
하지만서도 최소한 그것을 생각조차 못한 나는 여 들어와 있어도 싸다.
여태꺼정 아무 생각 없이 금남로를 싸댕긴거시 인자 와서 죄스럽고 인생 쪽팔리다."
심미진(한혜진): 산 사람보다 먼저 죽은 사람이 나한테 더 중요해.
김갑세(이경영): 그거 좀 아프다고 밴드 붙였군요
심미진(한혜진): 끝났네... 이렇게 끝났네... 창피하다... 미안하다... 그리고 화가 난다.
기억에 남는 몇 대사를 적어 보았다. 기억력의 한계때문에 토시까지 맞다고는 장담할수 없지만 대략적인 느낌은 맞다는 생각이다. 특히 마지막 두개의 대사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깁갑세의 대사에서는 분노를... 마지막 심미진의 대사에서는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내용을 적어서 스포일러가 되기보다는 이 사건의 역사적 전후관계와 역사적 의의 그리고 그 과정 속에 발생하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두환 집권의 빌미가 된 박정희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을듯하다. 리뷰라기보다는 영화를 보실 분들을 위한 배경지식의 전달 정도로 생각하면 될듯하다.
중학교 1학년 때, 아침 등굣길 버스 안에서 “박정희 대통령 서거”라는 방송이 흘러 나왔다. 사실 ‘서거’란 단어의 의미를 몰랐었다. 다만 속보를 전하는 라디오에서 슬픈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뭔가 안 좋은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학교에 도착해서 ‘서거’란 말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는 요즘말로 멘붕에 빠졌었다. 그 당시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박정희의 이미지는 ‘백마 탄 초인’이었다. 못하는 것이 없었다. 물론 지금이야 프레이저 보고서를 보면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못 살던 우리나라를 잘살게 만들었다고 하고, 문학에도 소질이 있어서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었다 하고 심지어 교과서에 실렸던 ‘나의 조국’이란 노래를 작곡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했다. 박정희는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위대한 영도자라고... 결국 이솝우화 ‘임금을 원한 개구리’에 나오는 개구리 마을에 내려온 학이었던 것을...
절대 권력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국민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의 죽음은 국가적 재난이었다. 특히 그의 장례식이 거행되던 날에는 전 국민이 울었다. 그의 상여가 지나가는 길에는 깊은 슬픔에 빠진 국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어린 내 머릿속에 박정희를 쏴죽인 김재규는 죽일 놈이었다. 어렸지만 국가의 아버지라 생각했던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에 대해서 상당히 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아버님께서 하신 말씀은 나를 큰 혼란에 빠트렸다.
“김재규씨가 나쁜 놈인지 좋은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지금 판단할 수 없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충격이었다. 잠시 아버님이 간첩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역시 내 아버지이시다”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판단은 정확했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라는 김재규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과연 김재규씨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박정희 유신독재를 끝낼 수 있었을까?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차지철은 부마항쟁이 발생하자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최인규(315부정선거 총지휘)와 곽영주(이승만의 경호책임자)가 죽은 건 자기들이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했다고 한다. 그와 함께 했던 박흥주, 이기주, 김태원, 유성옥도 한결같이 법정에서 김재규 부장의 지시가 옳았음을 증언하고 다시 태어나 같은 명령을 받더라도 김재규 부장의 뜻을 따르겠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지금은 역적이 되지만 늦어도 내년 봄이면 다 풀린다’는 유언을 남겼다. 봄이 와야 했다. 다 풀려야했다.
그러나 유신의 그림자는 길고도 어두웠다. 박정희는 쓰러졌지만 그가 양성한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신군부는 김재규와 부하들을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은인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반인륜적인 집단으로 몰아세웠다. 민주화를 짓밟은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5.18 민주화운동(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남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과 12·12사태를 주도한 신군부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 전두환 등의 신군부가 최규하 과도 정부를 붕괴시키고 정승화 계엄 사령관을 대통령 시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하면서 군부의 권력을 장악한 12·12 사태가 일으키고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가고 있었다.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를 기획했다.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군사독재를 연장하려하자, 학생을 중심으로한 수만명의 시민들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계엄 철폐 등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에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한다는 발표를 하고 학생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 휴교령 등의 민주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5월 18일 전남대생 200여명은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다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였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보고 합세한 시민들과 시위를 벌였으나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었다. 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과 고등학생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학생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5월 20일 20만명의 시민이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였으며,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고립되었고,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5월 21일 오전 전남도청과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21일 오전 시민 대표는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됐다. 전남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확성기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 철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1일 정오 12시경 전남대 앞·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다. 도청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수협·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했고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경찰서나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하였다.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5월 22일 이후 광주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 포위·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됐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외신기자들에 의하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질서를 찾아가며 '5.18사태 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다.
이 기간 동안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계엄사에 무기 자진반납을 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계속 무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수차례에 걸친 내부 대책회의와 협상 끝에 계속 무장을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평화적 시위는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됐다. 5월 27일 새벽 2시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발을 사격해 가면서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70년대의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고, 국민들의 대미인식(對美認識) 변화와 함께 사회운동의 목표로 민족해방·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기점이 되었다. 이 후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준거가 된 이 사건은 발발 당시에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되었다가, 1988년 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되었고, 1988년 11월 사건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가 개최되었다. 1995년에 '5.18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1997년엔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 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 천의 핏발 서려 있네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산 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랴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 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피 피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사회 각계 각층에서 불법적으로 집권한 신군부 인사를 고소·고발을 했다. 1995년 7월 검찰은 5.18 사건에 대해 전두환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국을 장악할 의도가 있었고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것이 확인됐지만,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내란죄·반란죄 여부를 따지지 않고 불기소 처분했다. 1995년 12월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인용결정을 내렸다. 같은 달 검찰에 특별수사부가 설치돼 12.21 사건과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고,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해 12.12 사건, 5.18 사건 공소시효 정지 규정을 두었다.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 23일, 검찰은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전격적으로 기소했다.
1997년 대법원은 두 전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이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했다. 이에 따라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는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전두환, 노태우는 95년 구속되었으나 97년 김대중 정권에 의해 징역형은 사면되었고 98년 복권되었다.
전두환은 잘못을 뉘우치기는 하는 건가?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치인들의 도덕성이 왜 중요한지를 느끼게 된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신군부들의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광주시민들의 의거였다. 정치적인 역학이 작용하긴 했겠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들에게 사면권을 준 것에 대해서 유감을 금할 길이 없다. 그 때 만행을 저질렀던 군부들을 색출하여 죄의 대가를 받게 해야만 했다. 용서란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잘못조차 부인하는 자들에게 주어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김재규가 기대했던 봄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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