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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설 (春雪)

로드그래퍼 2009. 3. 24.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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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설 (春雪)

 

 

 

 

 

 

 

 



 

     춘설(春雪)/ 이종봉

 

     새벽비는 눈으로 흩날리고

     창 밖 시야는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있다

     봄은 산에도 들에도 내 맘에도 꽃으로 피었는데

     시도때도 없이 내리는 춘설에 얼어버리면 어쩌나~

 

     보리밭 이랑에 너울거리던 아지랭이도

     눈발에 미끄러질까 두려워라

 

2009년 3월 24일 춘설속에서...

 

 

 

황병기 黃秉冀  HWANG, Byung-Ki "春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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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 黃秉冀 HWANG, Byung-Ki 1936 5 31, 서울출생

 

그는 놀랍게도 초등학교 3학년까지 낙제생이었다. 게다가 골칫거리 개구쟁이였던 소년 황병기가 마음을 고쳐먹게 된 것은 그의 외당숙(김소열) 덕택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틈 만나면 장난치던 그는 급기야 방과후 남아 놀다 당시는 귀하던 유리창을 깨뜨리고 말았다.

집에 온 그는 친히 지내던 아저씨에게 털어 놓고 이야기했다. 아저씨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나와 어제 한 일을 다 말씀 드려라. 그러면 선생님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칭찬 받고 영웅처럼 될 것”이라며 격려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옳다 믿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보고 피하지 않았다. 낙제생은 한 학기 만에 우등생이 됐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생이 됐다. 서울대에서 같은과 친구의 권유로 친구와 함께 부산에 있는 국립국악원에 가야금을 배우러 가려하는데 친구는 어떤 사정으로 같이 가지 못하고 황병기만 홀로 부산에 간다.


그 이후 전국국악경연대회 등에 기악부 1등을 차지하던 이 학생을 서울대 음대 학장 현제명 교수가 눈 여겨 봤다. 마침 대학 졸업 당시 생긴 국악과 강사를 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1주일에 1시간만이라도 맡아달라던 권유가 아직도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황병기의 음악세계

*작곡*
하나는, 그의 이전에 하지 못했던 가야금 독주의 지평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는 오선지로 기보한 최초의 독주곡 작곡자이며 동시에 가야금 독주곡의 양식을 제시한 첫 작곡가이다. 가야금의 성능과 표현력, 기능과 예술성 표출의 가능성을 잘 알고 있는 터에 가야금 곡의 양식을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작곡가였다. 또 하나는, 그가 작곡 훈련이나 창작 학습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작품으로 인정할 만큼 수준 높은 가야금 독주곡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정서, 형식*
그의 예술작품 생산은 누구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고 누구와 더불어 논의하지도 않은스스로 터득한 황병기 어법에 의해서 형성된 바다. 황병기 어법은 1962년의 <숲>으로부터 <가을> <석류집> <봄> <침향무> <비단길> <영목> <전설> <밤의 소리> <남도환상곡>과 1991년의 <춘설>에 이르기까지 12곡에 일관되게 침재하여 그의 개성적 양식을 이룬다. 그가 사용한 가야금 기법은 동질적 요소와 유사적 요소의 배합에 있다. 동질적 요소란 전통적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서 정악과 산조의 수법과 흐름을 말하고 유사적 요소란 정악과 산조의 동일한 성격의 창의적인 것과 또 우리 감정이 쉽게 수용할 만한 아시아적 수법을 말한다.


이러한 그의 가야금 기법은 감상자에게 새로운 음악이 주는 생소함이나 거부감 없이 전통음악의 어느 한 양식의 음악을 듣는 듯한 친숙감을 제공한다. 또 가야금 기법을 구사함에 있어서도 억지가 전혀 게재하지 않은 자연스러움과 덕지덕지 개칠하지 않은 경제적이며 효과적인 음들을 연결한다. 말하자면 음 하나 하나가 시김새를 갖거나 탄법을 달리하는 음들로서 소리에 생명을 부여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가야금곡이 표출하는 미적 범주는 곱고 정갈하며 투명하다.


*황병기의 업적*

황병기 교수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가야금 명인일 뿐만 아니라, 1962년 우리 음악사상 최초로 현대 가야금 곡 "숲"을 작곡한 이래 "침향무" "비단길" "미궁" "춘설" 등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하여 전통음악의 현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1964년부터 세계 각지에서 가야금 연주와 음반 취입, 방송 출연, 한국음악 강의를 함으로써 한국음악의 세계화에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1959년부터 40여년간 서울대학교, 국립국악원,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현재 각 대학교 가야금 교수와 연주자로 활약하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고, 1973년부터 문화재위원, 1994년에는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국악의 보급과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출처 : 우리소리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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