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마당산책/내가 본 전라도

[익산을 걷다] 미륵사지 - 아직 진행중인 왕도의 꿈

로드그래퍼 2010. 1. 27. 19:15

 

 

미륵사지

사적 제150호

백제(B.C. 18 ~ A.D. 660)에서 가장 큰 가람이었던 미륵사의 창건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30대 무왕(A.D. 600~641)이 왕비와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로 지명법사를 메우고 전(금당), 탑, 낭무(회랑)를 세 곳에 마련한 가람을 조영하였는데 신라 진평왕이 백공(百工)을 보내어 도와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발굴조사에 의해서 미륵사가 3원 1가람이며 산 흙으로 메운 못에 자리하고 있는점 들이 밝혀져 삼국유사의 기록이 실중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기술되어 있는 미륵사에는 창건당시 건축, 공예 등 백제의 문화역량이 최대한 발휘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등 삼국의 기술이 결집되었다는 내용은 최근에 발견된 사리장엄의 내용과는 상충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당시에 늘 전쟁을 치루고 있던 두 나라사이에 기술교류가 있었을리가 만무하고, 삼국중 문화 예술분야에서 독보적이었던 백제가 신라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승자의 논리에서 쓰여진 삼국유사의 허구적 내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미륵사의 창건은 이곳 금마에 가람을 조영하여 마한 세력을 아우르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을 것이나 황룡사로 대표되는 신라 화엄신앙에 대비되는 백제 미륵신앙에 바탕한 것입니다. 미륵사는 조선시대 A.D. 1600년을 전후한 때에 폐사되었습니다.

 

[삼국유사] 권2 무왕조(武王條)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무왕(600~641)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로 향하고 있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하여 못을 메우고 탑과 법상, 미륵삼회전, 낭무(廊廡)의 건물을 건립하고 미륵사라 이름했다고 합니다. 17세기경에는 이미 폐사된 미륵사는 현재는 복원중에 있는 서탑과 이미 복원이 완료된 동탑 그리고 당간지주 등 일부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륵사지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 일제강점기 때 이미 조사되기 시작했으며 그뒤 1980년대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로 동탑과 서탑 사이에 목탑을 세워서 일직선상에 탑 3개를 배열하고, 각 탑의 북쪽편에 금당을 1개씩 둔 가람배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 쌍의 금당과 석탑에는 각기 회랑이 둘러져 있어 탑과 금당을 1개의 절로 생각할 때 마치 3개의 절이 모여 있는 듯한 3원식(三院式)의 구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3개의 금당에 모두 지하공간이 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물입니다. 이 절터에서는 막새기와·토기·불상 등을 비롯하여 1만여 점의 각종 유물이 나왔으며 특히 '미륵사'라든가 '국5년경진'(國五年庚辰) '요봉원'(姚奉院) '지원4년'(至元四年) '천력3년'(天歷三年) 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 미륵사지는 미륵삼존불의 출현으로 절을 짓게 된 창건동기나 미륵이 이 세상에 와서 3번의 설법을 하기 위한 3군데의 장소를 마련하고 있는 점, 그리고 미륵이 머무를 장소로 금당에 지하공간을 설치했다는 점 등에서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내려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건립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차장에 건립되어 있는 당간지주를 형상화한 구조물입니다. 예전 같으면 "뭐야?"하고 지나쳤을텐데 릴라 많이 늘었습니다. 역시 공부는 계속되어야합니다. 요즘 우리의 옛모습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이것저것 새롭게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미륵사지 복원 예정도입니다. 옛모습을 원형 그대로 볼수없음이 아쉽기는 하지만 성공리에 복원이 이루어져서 예전의 아름다움을 다시 보여주길 바래봅니다.

 

 

 

 

 

 

정문을 들어서자 정면으로 사리장엄과 서탑이 보입니다. 사리장엄과 서탑사이는 목탑이 있던 금당지입니다.

 

 

 

 

 

 

정문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미륵사지 유적전시장의 모습입니다.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휴관일이어서 안타까웠습니다. 휴관일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리모델링관계로 일부전시장을 관람할수 없다고 하니 다음에 리모델링이 끝나면 다시 방문해서 차근차근 둘러봐야겠네요.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불교 국가중 한국에서 독특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으로, 불교 도입 이전의 소도, 장승 (蘇塗, 長丞)사상에서 유래되어 사찰 건립과 동시에 입구 측에 건립되어 온 것입니다. 이는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 따른 영향으로 볼수 있습니다. 높이 약 3미터가량의 두 당간지주 사이에 높이 약 15미터 가량의 당간을 꽂아서 멀리서 볼때 사찰의 위치를 알려주고, 경계, 상징, 벽사(境界, 象徵, 辟邪)등의 의미로 조성하였으며, 당간 꼭대기에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사찰의 깃발을 꽂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당간지주는 고려말 이후 차차 산지로 가람이 이전되고, 당간의 조성 의미도 줄어들면서 점차 잊혀져갑니다.

 

당간지주 건립이 차차 사라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원래 초기 평지 가람에서 당간지주를 세워 높은 당간을 꽂아 깃발을 달던 이유는 그 첫째가 온통 단층 건물뿐이던 시절에, 가람의 위치를 알려주고, 불보살의 위세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답니다. 즉. 현실적으로 저층 위주의 건물뿐이던 당시 도읍지에서 15미터 이상이나 되는 높은 당간을 꽂아 금방 누구든지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죠. 하지만, 통일신라 말기를 거치면서 선종이 들어오고, 구릉지가람으로 이행되면서, 높은 당간의 시각적인 효과는 평지가람에 비해 낮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더군다나 차차 산지 가람으로 이행되던 시기에는 높은 당간에 달려서 신도들에게 위용을 뽐내던 깃발의 시각적인 효과는 거의 기대할 수가 없게되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차츰 사찰에서 당간지주 건립과 당간에 깃발을 달던 전통 의식이 사라져간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시각적 효과의 반감, 내지 감소로 인한 당간 조성의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라 할 수 있고, 외향적인 형식보다는 개인의 정신 수양 및 내실을 중시하여 산중 불교로 발전한 계기가 된 선종의 발전도 그 배경이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간지주의 외형은 초기 원시 사상에서 유래된 "남근숭배사상(男根崇拜思想)"의 영향으로 외형 자체가 바로 남근의 형상을 띄고 있습니다. 평면상 지주의 장, 단변의 길이 비율이 고대에서 주로 사용되던 비례수치인 1 대 루트 2로 만들어졌고, 당간지주의 단변 길이와 맞은편 지주와 떨어진 거리의 비율 역시 1 대 루트 2의 비례가 적용되었습니다.

 

가람 공간상의 위치상 특징은 평지 가람일때는 대웅전을 중심으로한 가람 주축선과 멀리 떨어져 있고, 두 지주가 향하는 방향도 가람 주축선과 평행하게 건립되었습니다. 산지 가람일때는 가람 주축선과 가장 많이 가까이 위치해있고, 두 지주가 향하는 방향도 가람 주축선과 직각을 이루고 있습니다. 구릉지 가람일때는 위의 평지와 산지 가람일때의 특징들이 각각 반반씩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간지주의 이러한 공간적인 특징들은 폐사지일 경우엔 원래의 가람 주축선의 위치와 방향을 유추할수가 있어서, 폐사지 발굴작업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이 당간지주는 동서로 2기가 90여미터의 거리를 두고 세워져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주의 높이는 4M입니다. 당간지주는 대개 중문 밖에 세워지는게 상례인데 미륵사지의 당간지주는 중원의 중심축선을 기준으로 좌우 양쪽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미륵사 동원 9층석탑

1974년 동원탑지를 발굴조사하던중 기단의 규모와 형태 그리고 출토유물로 보아 동원탑지에 서탑과 샅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음을 알게 되어서 그 자리에 1991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복원에 따은 고증자료는 서탑과 동원 동탑 기단부 및 1980년 이후 동탑지 주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노반석을 비롯한 석재를 활용하였다고 합니다. 복원된 탑은 하층기반이 1변 12.5M 상층기반이 10.5M인 2중 기단이며 9층으로 지면으로부터 상륜부까지의 높이는 27.8M입니다. 탑의 내부에는 1층 탑신에 +자형 통로가 있고 2층부터는 공간이 없이 막혀있습니다. 옥개석과 상륜부에 달린 풍탁은 동탑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금동풍탁을 복제한 것입니다. 탑 복원에는 익산 황등에서 캐낸 화강암 총 2,000개 2,700톤이 사용되었으며 백제시대 석탑 기단석과 탑신석 35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층 옥개석에 달려 있어야 할 풍탁 하나가 소실되어 있네요. 

 

 

 

 

 

 

원래 탑신석과 옥개석의 모습도 보이네요. 예전 같으면 이끼낀 탑신석과 옥개석의 모습을 보고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했을듯합니다 

 

 

 

 

 

 

아름다운 9층석탑이 태양빛에 물들어갑니다. 

 

 

 

 

 

 

 

 

 

 

사리장엄

불교에서 “장엄(莊嚴)”이란 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이나 꽃 따위를 부처에게 올려 장식하는 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리장엄(舍利莊嚴)”은 ‘장엄’하는 도구와 함께 사리를 보관하는 장치를 뜻합니다. 사탑(寺塔)의 기본 기능이기에 사리장엄은 전국 각지의 탑에서 너무나 흔히 발견되는 유물입니다. 새로울 것도 없는 사리장엄 중에서 유독 미륵사지 석탑의 것이 주목을 받는 것은 그 봉안기에 ‘서동요’를 부정하는 기록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사리봉안기의 중요한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근(善根)을 심으셨기에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태어나셨다. 왕후께서는 만백성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이 되셨으니 재물을 기부하여 사찰을 세우시고 기해년(639) 1월 29일에 사리를 맞이하셨다.

 

이 기록을 통해서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가 서기 639년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는 무왕이 죽기 2년 전의 일입니다.
2. 백제 무왕의 왕후는 ‘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입니다. 서동요에 나오는 선화 공주 설화는 허구일 가능성이 많으며, 설령 사실이라 해도 선화 공주는 정비(正妃)가 아니고 미륵사탑과 관계가 없습니다.
3.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진평왕이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미륵사의 창건을 도왔다"라는 기록도 풍문을 전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에 늘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두 나라 사이에 기술 교류가 있었을 리도 없고, 삼국 중에서 문화 예술 분야에서 독보적이었던 백제가 신라 공인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따라서 미륵사는 백제의 독자적 기술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간지주 뒤로 보이는 건물은 서탑이 있었던 장소로 사리장엄이 출토되어 지금 발굴 복원중인 장소입니다. 국보 제 11호는 현재 복원중입니다.

 

 

 

 

 

 

 

어린시절 국사책에서 보았던 미륵사지석탑의 예전 모습입니다. 동양최대의 사찰이었던 미륵사의 터를 1,400여년간이나 백제의 정기를 간직한채 지켜온 미륵사지석탑은 시멘트 덩어리로 몸을 지탱하고 있다가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원래 9층이었을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석탑은 절반이상이 붕괴되어 6층일부까지 남아있던 것을 붕괴위험성때문에 1999년 해체 보수정비가 결정되어 2001년부터 현재까지 해체 보수가 진행중입니다. 석탑 해체작업중 심주석 상면 중앙의 사리공에서 금제사리호, 금제사리봉안기, 은제관식등 유물 683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석조건축적인 측면에서도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미륵사지석탑은 목탑양식을 석재로 표현한 것으로서 이는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 크다고할 수 있습니다.

 

 

 

 

 

 

십자형 심주석의 모습. 심주석의 중앙이 사리장엄이 출토된 장소입니다

 

 

 

 

 

 

 

금동제사리외호 

사진상 커 보이지만 실제 크기가 13cm로 담배갑보다 조금 큰정도입니다. 금동제사리외오의 목, 저부에는 연꽃잎을 동체는 인동당초, 연화당초문으로 선각하고 여백은 어자문을 시문했습니다.

 

 

 

 

 

 

금제사리내호

 

 

 

 

 

 

미륵사지석탑 복원 현장의 모습입니다 

 

 

 

 

 

 

 

 

 

미륵사지9층석탑의 컴퓨터복원 예상도입니다 

 

 

 

 

 

 

 

금당지와 목탑지

중금당과 중앙목탑이 있었던 터입니다. 미륵사의 금당은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삼금당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금당은 세워진 위치에 따라 서금당, 동금당, 중금당으로 불리웁니다. 그리고 탑의 배치는 동탑과 서탑은 석탑이고 중앙탑은 목탑이었다고 합니다. 서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점을 감안해보면 중앙탑이 가장 먼저 세워졌음을 알수 있습니다. 각각의 탑 뒤에는 부처님을 모시는 금당이 자리했는데 이것은 회랑(복도)으로 구분되는 특이한 가람배치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금당의 바닥에는 빈공간이 있었는데 이는 연못에 세워진 금당에 습기를 대비한것으로 추정됩니다.

 

 

 

 

 

 

금당이 지어져있던 자리에 돌이 박혀져 있습니다. 원매 못이었던 자리에 사찰을 세우다보니 흙만으로는 기초가 튼튼하지 않아서 먼저 돌들을 박아 기초를 다지고 돌기둥으로 바닥의 공간을 두었다고 합니다. 

 

 

 

 

 

 

 

 

미륵사지 석등하대석 

문화재자료 제 143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등하대석은 현재 모두 2기가 남아있는데, 1기는 동쪽에 복원해 놓은 석탑과 금당터사이에 있고, 다른 1기는 중앙의 목탑터와 금당터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석등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석등의 최초양식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미륵사지의 낙조

태양빛에 미륵사지와 제 마음을 동시에 물들이네요.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번지

익산시청 문화관광과 (063) 859-5778

 

 

미륵사지에서

17. Jan.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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