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마실가기/2010 Manchuria

[만주기행] 발해 옛수도 상경용천부 성터를 돌아보며 느낀 슬픔

로드그래퍼 2011. 3. 3.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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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여행을 다녀와 만주기행 prologue를 쓰고 무려 4개월이 지나고나서 첫번째 여정의 글을 씁니다. 물론 그동안 바쁜일이 있기는 했지만 첫 여정 포스팅이 이렇게 늦어진 것은 꼭 제가 바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울분

그렇습니다. 울분... 울분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음을 전혀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던 내 자신에 대한 울분... 국사라는 과목을 대학입시에서 선택과목으로 만들어버려서 국사를 배우지 않고도 대학에 진학할수 있는 대한민국 교육제도에 대한 울분...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정부에 대한 울분...

 

오늘 이 이야기를 올리고나면 다음이야기는 또 언제 올라가게될지 기약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주기행 prologue를 쓰면서 말씀드렸었던 3월부터 포스팅하겠다고 했었던 근현대사 또한 언제 시작될지 약속드릴수가 없는 실정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울분때문에 제대로 글로 풀어낼수 없는 이유도 있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제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껴서 함부로 포스팅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부족하나마 써야하는 것일지...

 

제가 만주로 떠났던 때는 백두산폭발설이 실시간 검색어 1위까지 오르며 인터넷이 시끌벅적하던 때였습니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갔다가 먼훗날 화산속에서 유물처럼 발굴되는 것이 아닌지... 개스가 분출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뱀들이 떼로 몰려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화산폭발의 증후가 발표되면서 우리 일행을 겁먹게 했죠.

 

그런데 만주에 도착해서보니 백두산폭발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가 현지인들에게 "한국에서는 이것때문에 난리도 아니다"라고 말했을때, 현지인들은 "여기 사는 우리도 모르는 이야기가 왜 한국에서 도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더라구요. 어쩌면... 아마도... 정부가 뭔가를 숨길것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문에 보도되는 내용을 여과없이 100% 믿을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면 너무나 큰 바람일까요?

 

인천공항에서 목단강으로 가는 비행기는 일주일에 간 한편뿐인데 백두산폭발설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비행기는 너무나 한산했습니다. 우리 일행 4명과 다른승객이 4명 더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산한 비행기는 처음 타 보았습니다.

 

 

 

 

 

 

 

비행기차창밖으로 중국의 산하가 보입니다. 우리나라 산하의 모습과는 조금 다릅니다. 드디어 우리 역사의 무대였던 만주에 도착했습니다. 이때까지만해도 즐거움이 가득한 여행이 될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목단강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줄지어 서있는 빨간택시의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하지만 이 택시를 이용행대는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고 합니다. 행선지를 말하면 가격을 이야기하는데 바가지요금인 경우가 많을뿐더러, 그 액수조차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일인당요금이었다고 하면서 과다징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일행이 타고 7박8일간 고구려 발해의 유적 그리고 구한말 우리 조상들의 항일역사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여정의 발이 되어줄 자동차입니다. 이 차를 타고 우리 일행은 간도로 들어갑니다. 간도는 조선사에서는 청과 조선간의 국경선 분쟁지역이었고 근현대사에서는 너무나도 중요한 독립운동의 근거지입니다. 이곳을 근거지로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할수 있었습니다. 앞서간 선배들의 독립운동의 역사의 현장을 생생히 전해드리겠습니다.

 

 

 

 

 

 

이번 만주기행은 발해 상경용천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발해(渤海, 海東盛國) 서기 698∼926년(15명의 왕, 230년간 존속).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 중심의 고구려 유민이 주체가 되어 말갈족과 결합하여 동모산에서 건국, 통일신라와 남북국의 형세를 이룸. 전성기의 영토는 상경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러시아 연해주, 서쪽으로 요동반도, 북쪽으로 송화강, 남쪽으로 원산만과 대동강에 미쳐 통일신라의 4배, 고구려의 2배에 이르러 ‘해동성국’이라 불릴 만큼 국세를 떨쳤으나 926년 요나라에게 망하였다.

 

 

 

이제 발해의 역사속으로 들어갑니다.

 

 

 

 

 

 

발해진
목단강 유역의 평탄한 분지 가운데 바로 상경성이 자리잡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해동성국 발해라 하면 먼저 상경용천부를 연상할 만큼 이곳은 실로 발해 역사의 가장 유명한 도읍지입니다. 발해의 교통간선들은 수도 상경성을 중심으로 하여 크게 다섯갈래 즉 압록도, 영주도, 거란도, 신라도, 일본도로 뻗어있었습니다. 상경성 유적은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평탄한 개활지내에 자리잡고 있는데 많은 책들은 이 발해국 도읍지가 자리잡은 곳을 동경성이라 쓰고 있고 이곳은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할듯합니다.

 

 

 

 

 

 

 

 

 

발해의 왕궁 내성의 모습입니다. 외성까지 보인다면 주작대로가 나타날텐데 아쉬웠습니다. 상경궁(上京宮)이라 써있는 곳 바로 위에있는 문이 주작대로가 시작되는 장소입니다. 

 

 

 

 

 

 

국사교과서에서 많이 보았었던 성왕때의 5경 15부 62주를 보여주는 발해광역도입니다. 발굴중인 상경용천부 성터 입구에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일본해"라고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동해로 바꾸어 놓았네요. 해외여행을 하면서 한글낙서가 보일때마나 항상 부끄러웠는데, 한글낙서가 통쾌해보기는 처음입니다. 낙서라고 말하면 안될듯한 기록입니다. 일본해가 아니고 동해라는 사실을 알리는 일을 어째서 정부가 아닌 김장훈씨가 해야 할까요.

 

 

 

 

 

 

상경터
상경의 화려한 궁궐은 무너지고 왕도 옛터에 잡초가 무성하지만 옛성벽은 일천여 오랜 세월의 풍상속에서도 해동성국의 웅장함을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외성은 총 둘레가 16,296.6평방미터나 되는 직사각형으로 동서남북 네 성벽에 모두 10개의 문을 내었고 성벽에는 해자를 파놓았습니다. 외성안의 북쪽 한 복판에 내성이 있는데 내성은 장방형으로 생겼는데 남북의 길이가 1,000m, 너비가900m 총둘레가 3,986m에 달합니다. 지금은 거의 밭으로 변해버려 그 성벽의 참 모습을 일부 구간에서만 찾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발해의 역사와 유적이 남아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지만 고교시절 교과서에서 발해는 서자였습니다. 교과서에 삼국의 역사를 채우고 종이가 남았던지 덤으로 서너장 붙어넣었던...

 

 

 

 

 

 

 

외성안으로 들어오니 위로 올라갈수 있도록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올라가 봅니다.

 

 

 

 

 

 

 

 

외성위의 모습입니다.

 

 

 

 

 

 

외성에서 바라본 상경용천부의 모습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유적은 파괴되어 사라지고 터만 남아았습니다. 발해 최대 전성기때의 수도인데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슬픔의 역사입니다. 씁쓸한 역사의 뒤안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슬픈 역사속에 죽어있었던 발해가 발굴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죽어있던 발해는 동북공정과 함께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비밀리에 발굴되는 유물들은 또 얼마나 변질될까요. 그리고 그 변질된 역사는 진실로 포장되어 가겠죠.

 

 

 

 

 

 

복원이란 미명하에 주춧돌 위에 그럴듯한 궁궐이 들어서면 그 변질된 역사는 살아있는 역사가 되겠지요.

 

 

 

 

 

 

아무리 발굴이 급해도 이건 아니죠...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놓은 모습이 어린 시절 동네에서 흔히 볼수있던 축대와 다를것이 없는 모습입니다.

 

 

 

 

 

 

참담한 심정으로 박물관으로 발길을 옯깁니다.

 

 

 

 

 

 

내 마음과는 달리 시골풍경은 평화롭기만 합니다

 

 

 

 

 

 

 

박물관은 상경용천부 성터를 발굴하고 있는 현장에 인접해 있습니다. 이번여행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사진촬영이 용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곳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관리자에게 어렵게 허락을 받고 몇 컷만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발해의 기병이겠죠? 벽화속에서 보았던 고구려기병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진속에 기병의 모습중 말을 타고 뒤쪽을 향해 활을 쏘는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농경민족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고구려, 부여, 발해는 기마민족이니까 당연한 모습이라 할수 있겟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제의 벽화에서도 이런 모습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배운것처럼 백제가 농경민족이 아니고 백제의 영토가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지 않을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실 백제의 역사속에 나오는 지명중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그 지명은 중국에서 발견되구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속에서 가장 큰 비극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민족의 활동무대를 한반도로 축소시킨 역사적 비극 신라의 삼국통일... 우린 그런 삼국통일을 역사적 위업이라 배웠고, 친구와 싸우다 불리해지자 양아치 친구(당나라)를 싸움에 끌어들인 김유신과 김춘추를 위인이라고 칭하며 위인전에서 읽어왔죠. 신라의 삼국통일은 MB의 대통령당선에만 비견될수 있는 역사의 비극입니다.

 

 

 

 

 

 

발해의 석등입니다. 신라의 법주사 쌍사자 석등과 비견되는 그리고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을 보여주는 고구려 문화의 전동이 강하게 남아있는 발해의 석등입니다. 기단부에 세겹 연꽃잎과 윗부분에 꽃잎이 두텁게 조각되어있고 기둥은 배흘림기둥입니다. 발해석등은 다음번 포스팅이 될 흑륭사에서 자세히 보여드리겟습니다.

 

 

 

 

 

 

한쪽 벽면에는 발해의 왕들의 초상이 걸려있었습니다. 황제의 복장을 하고 있는 발해 3대왕인 문왕의 초상입니다. 그런데...

 

 

 

 

 

 

문왕을 제외한 나마지 왕들은 황제의 복장이 아닌 신하의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국의 관점에서는 발해라는 국가는 한국사에 존재하는 해동성국이 아닌, 중국의 변방, 중국의 신하국가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발해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속으로 편입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교과서에서 발해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라고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발해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속에서 찬란히 빛날수는 없는 것일까요?

 

 

 

 

발해는 고구려 후예들이 세웠기 때문에 우리들은 고구려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으나, 한때 러시아의 연해주까지도 발해의 영토였기에, 이는 국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여기서도 발해를 고구려의 연장으로 취급하여 고구려로 대표해서 서술하겠습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증거

① 조선시대 실학자인 유득공이 발해의 역사를 최초로 저술한 저서인 발해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 무릇 대씨(대조영)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어디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서, 그리고 북쪽을 개척하여 그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②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
•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 고(구)려는 국왕 대흠무가 말한다.
• 발해왕에게 칙서를 내렸다. (일본)천황은 삼가 고(구)려 국왕에게 문안한다.
<일본국서>


③ 삼국과 발해의 막새기와(연꽃무늬)

 

 

 

동북공정에 대해서

2천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 정부의 산하기관인 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은, 동북공정이란 프로젝트로 고구려 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작업을 하면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까지도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려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이는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짓밟아 버리고, 역사까지도 침탈해가는 작태라고밖에 볼수 없습니다. 동북공정이란 중국에서 볼 때 동북방향에 있는 3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을, 옛날부터 중국의 영토라고 역사서에 총정리를 해둔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근거로 중국에서는 동북3성, 즉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를 옛날부터 자기의 영토라고 우기는 것일까요? 중국측의 주장과 반론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주장 1.

고조선에는 기자조선이 있었는데, 중국의 주장은 “은(殷)· 주(周)왕조 후예들이 한반도에 건립한 지방정권으로서, 후에는 모두 주(周)와 진(秦)의 해외속국”이라는 것이다.

 

주장 2.

서기 607년 고구려 영양왕이 돌궐추장과 동맹을 맺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돌궐추장 계민의 막사에서 순행중이던 수양제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때 수양제를 동행해 따라왔던 황문시랑(黃門侍郞)벼슬의 배구(裵矩)가 수양제에게 말했다.
[고구려는 본래 기자(箕子)의 봉한 땅으로, 한(漢)나라와 진(晉)나라가 모두 군(郡)· 현(縣)으로 하였는데, 그러나 지금은 수나라에 신하의 도리로서 행동하지 않고, 별도의 지역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수문제께서는 오랫동안 고구려를 징벌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  중략 ······오늘 고구려사신은 돌궐의 계민이 나라를 바쳐 황제폐하께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고 두려워하는 것 같으니, 이를 위협하여 그들로 하여금 입조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그러니까 위의 주장1과 2를 보면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것이 아니고, 중국사람 기자가 한반도에 와서 세웠다는 주장입니다.

 

 

반론

옛날 중국 사람들이 쓴 위서(魏書)를 보면,“2천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요(堯)와 같은 시기였다”라고 되어있습니다다.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은 자기들 조상들이 쓴 위서(魏書)마저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기자는 단군조선을 이어받아 단지 왕이 되었을 뿐입니다.


참고로 우리들은 중국 역사서를 해석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중국은 세상의 중심이고, 주변국들은 중국의 황제를 섬기는 번국(蕃國=제후국)에 불과하다”라는 이른바 중화중심사고에 의해 기술된 문서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중화중심사고의 피를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지금도 주변의 모든 국가는 옛 중국에 종속된 지방정권이었다고, 줄기차게 일변도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계를 정복했던 몽골의 칭기스칸도 중국인이었다고 왜곡해 놓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수 없었던 소련의 붕괴처럼 중국의 붕괴를 기원해 봅니다. 티벳을 비롯한 중국내 소수민족의 독립을 기원합니다.

 


주장 3.

중국 한나라 무제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되면서, 지금의 대동강 유역에 이르는 곳까지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었고, 또한 “고구려가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의 군치였던 고구려현에서 탄생하였으니, 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라고 주장합니다.

 

반론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은 설치 당시의 군치를 예맥의 땅인 압록강 중류지역에 자리 잡고 고구려현(高句麗縣)이라 칭하였는데, 현도군에 지배를 받아오던 고구려현(高句麗縣) 관하의 본주민인 예맥족이 기원전 75년에 항쟁을 일으키자, 현도군은 쫓겨 밀려나 요동의 혼하(渾河)상류에 있는 흥경(興京=씽징)의 노성(老城)으로 옮겼습니다.
말하자면 현도군에 지배를 받던 예맥족(예군남여)이 기원전 75년에 항쟁을 일으키자, 현도군은 쫓겨 흥경(興京=씽징)의 노성(老城)으로 옮겼었고, 그 후 주몽이 기원전 37년에 졸본에서 고구려를 건국했으므로, 현도군과의 연관성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주장 4.

<보장왕 4년(서기 645) 3월에 군사를 이끌고 정주(定州)에 도착한 당태종은 출격명령을 내렸다.>
[요동땅은 원래 중국의 땅이니라, 수양제는 네 차례나 정벌에 실패하였다. 나는 고구려를 쳐서 중국을 위해서는 요동 땅에서 죽어간 수나라 병사들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위해서는 억울하게 시해당한 영류왕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함이다. 내가 사방을 평정하였으나 아직 고구려만 남아있으니, 아직 내가 늙지 않았을 때 사대부(士大夫)들의 힘을 빌려 이를 공취 하고자 한다. 자! 당나라 군사들은 출동하라!]
지금 중국 사람들은 당태종이 한 말을 근거로, 요동땅이 원래 중국의 땅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반론

당태종의 이 말은 서기 645년 3월에 고구려 원정에 나설 때 한 말입니다. 수나라가 네 번씩이나 취하지 못한 고구려를, 자신이 중국을 위해 이에 발 벗고 나서서 원수를 갚겠다는 것인데, 이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염전의식을 느낀 군사들에게 보여준, 당나라가 의당 고구려를 쳐야한다는 거짓명분에 불과합니다.

 


주장 5.

이 외에 중국황제가 고구려 왕에게 책봉을 했고, 고구려는 매년 조공을 바쳤기 때문에 중국의 소수지방정권이 맞다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론

이 책봉이라는 자체가 매우 엉터리입니다. 중국측이 고구려가 중국의 중원정부에 예속된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을 할 때, 빠짐없이 근거로 제시하는 부분인데, 이 대목을 중국의 역사서인 남제서(南齊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구려국은 서쪽으로 위나라 오랑캐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송나라 말기에 장수왕을 거기대장군개부의동삼사(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로 삼았었는데, 남제 태조가 그를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올려 책봉하였다.>


책봉이란 요즘 같으면 신임장을 말하는 것인데, 소도성이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제(남제)나라를 세워 황제에 오르는 즉위식, 요즘 같으면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할 때에 여러 인접한 국가들의 왕에게 칭호를 내린다면서 낭독하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서 제나라 신료들과 군사들에게 인접한 국가들로부터, 송나라를 멸하고 제나라를 세운 것은 정당한 것이었고, 또한 상국(上國)으로 인정받은 대국이라는 위엄을 떨치고자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는 인접국가 왕들로부터 속국이 되겠다는 서약서 형식의 글을 받고, 또 조공을 받음으로서 책봉을 내리는 것인데, 소도성은 고구려로부터 축하사절단도 오지 않았고 서약서라든지 조공도 받지 않았는데도, 서둘러 즉위식에서 장수왕에게 책봉을 한 것이다. 이것을 어찌 엉터리가 아니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조공과 책봉은 그 당시의 외교적 관례였습니다. 아무튼 우리민족은 지나치게 예절이 너무 바르고 인심이 후덕하여, 오히려 남에게 손해를 보는 격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웃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면 외교사절이 가고 오는 것이 당연지사이고, 빈손으로 가기가 민망하여 선물을 가지고 간 것인데, 중국에서는 모두 조공이라고 기록을 해 놓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측에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낼 때 선물을 가지고 왔었는데, 왜 그것은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다고 쓰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중국이 이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다고 쓰기가 싫었던 것이다.

 

아무튼 고려 때 김부식 일행이 중국 역사서를 그대로 베껴 쓴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고 하면 무조건 조공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다른 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그 나라 임금에게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선물을 보내면 무조건 조공하였다고 기록한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에 지금의 예를 들어 중국의 당서기가 우리나라에 외교 차 선물을 가지고 와서 회담을 한다면, 중국이 우리나라에 조공하였다고 할수있을까요? 그러니까 중국의 역사서는 대륙 제일주의 견지에서 주변의 모든 국가를 속국으로 인정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 왜곡의 증거로 아주 기가 막힌 대표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서기 1840년부터 1842년까지 아편문제를 둘러싼, 중국 청나라와 영국 간에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결국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영국과 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이 조약을 맺은 것도 “영국이 조공을 바치러 왔다”고 기록하였고, 자기들이 전쟁에 패해서 항복문서를 쓰는 것도 “영국의 오랑캐들이 우리 중국문화를 흠모해서 문화를 받겠다고 하기에 이에 잠시 허용했다”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에서는 자기나라만이 상국(上國)이고, 이웃나라들은 모두 속국이며 또한 오랑캐들로 치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북공정의 목적은 무엇일까?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반도를 침탈할 목적보다는, 55개 종족으로 구성된 그들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소수민족에 대한 내부 정치적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일환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요즘 티벳 사태를 보면 중국정부의 고민을 알 수가 있는데, 그동안 중국은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소련연방이 깨지는 것을 보아왔고, 앞으로 남북한이 통일되면 동북3성 지역에 사는 조선족의 분란이 예상되고, 분열과 영토문제가 분명히 벌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에, 그래서 중국의 근간을 확실히 하고 후세에 종족간의 우환을 미리 차단하려는 속셈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2008년에 열렸던 베이징올림픽이전에 변방의 공정을 마무리하여, 위대한 중국문화와 역사를 자랑거리로 내세우기 위해서이기도 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론
지금 중국은 옛날부터 고구려가 중국 본토에 예속된 속국이었으므로, 고구려는 자기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역사를 날조 왜곡하고, 고구려의 문화유산인 유적지를 유네스코 지정문화재로 올리는 등, 오래전부터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많은 예산을 책정하고 지원하여 치밀하게 고구려역사를 침탈하여 중국역사로 둔갑시키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중국 동북3성 지역은 환웅족의 단군이 세운 고조선 때의 영토이고, 한 때 한(漢)나라에 의해 나라이름을 잃은 적도 있었으나, 광개토대왕 이후에는 완전히 우리 고구려영토로 회복되었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흐르고 조선 말기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만주일대가 우리 땅이었는데, 중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룬 일본의 계략에 의해 만주국이 건설되었다가, 세계 제2차 대전이 일어나고 일본이 패망하면서, 세계정세가 복잡 미묘하게 얽혀버려 이런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참고서적
고구려통사  - 김종식 엮음

만주 오천년을 가다 - 박혁문 지음

과학으로 찾은 고조선 - 이종호 지음

동북공정 알아야 대응한다 -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 지음

 

 

FreeGrap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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