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마실가기/2010 Manchuria

[만주기행]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찾아떠난 2700Km의 대장정 prologue

로드그래퍼 2010. 11. 10.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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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은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운 뜻깊은 여행이었습니다. 학창시절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모르고 있던 사실,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제 여행이 끝났습니다. 이제 공부가 시작될것입니다. 이번 여행이 대한 포스팅이 끝나면 근현대사에 대한 포스팅이 시작될듯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 충분한 학습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근현대사에 대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내 공부가 일정 수준에 이르르면 포스팅을 시작할것입니다. 늦어도 내년 3월 이전에는 시작할 것입니다.

 

아래는 7박 8일동안 고구려와 만주의 역사를 찾아서 여행한 여정의 간락한 소개입니다. 비행기 창문을 통해 구름아래로 중국의 산하가 보입니다.

 

 

 

 

 

 

발해동경성

상경의 화려한 궁궐은 무너지고 왕도 옛터에 잡초가 무성하지만 옛성벽은 일천여 오랜 세월의 풍상속에서도 해동성국의 웅장함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외성은 총 둘레가 16,296.6평방미터나 되는 직사각형으로 동서남북 네 성벽에 모두 10개의 문을 내었고 성벽에는 해자를 파놓았다. 외성안의 북쪽 한 복판에 내성이 있다. 내성은 장방형으로 생겼는데 남북의 길이가 1,000m, 너비가900m 총둘레가 3,986m에 달한다. 지금은 거의 밭으로 변해버려 그 성벽의 참 모습을 일부 구간에서만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흥륭사

발해 제일의 웅장한 수도였던 상경에 있는 10여개의 절터중 가장 유명한 절터가 있다. 이 절은 성의 남쪽에 위치하며 일찍이 석불이 있다 해서 석불사로 불리어오던 발해시대의 절터였는데 기초만 남아있다가 청대에 들어와 흥륭사라는 절을 지었다. 지금은 1861년에 중건된 다섯 채의 건물들이 남아 있는데 모두 상경성 발굴에서 나온 각종 유물들을 진열하고 있는 발해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중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거대한 석등이 있고 석등 바로 뒤에 있는 삼성전 한 가운데는 거대한 석불이 봉안되어 있다.

 

 

 

 

 

 

홍방체험

홍방은 썩은두부라고 불리우는 음식이다. 제조방식자체가 혐오스럽긴 하지만 음식은 그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이니 여행길에 어찌 그 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마다하랴. 처음에는 치즈인줄 알고 입에 넣었으나 짭짤하고 꼬리한 향에 놀라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썩은 두부란다. 이것보다 한수 위인 청방도 있었으나 그것은 차마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더라.

 

 

 

 

 

 

봉오동 반일 격전지

독립군 총지휘자인 홍범도가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크게 승리하였던 전투터. 봉오동에서 참패를 경험한 일제는 독립군의 탁월한 전력과 강인한 투지를 새롭게 평가하게 되었고 이후 독립군의 활동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고 독립군에게는 독립전쟁에 대한 큰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지휘관인 홍범도는 國亡 전후에, 갑산, 장백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의 면목에서 독립군의 명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도문 중조변경

두만강은 압록강과 함께 우리나라의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강이다. 이 강에 얽힌 민족 비극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 강에는 압록강보다 훨씬 사연이 많다. 압록강이 정치 군사관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면 이 강에는 민족의 삶과 애환이 점철되어 잇는 곳이다. 도문세관이 있는 다리 위에 중국의 다리는 붉은색으로 북한의 다리는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두만강 아래쪽의 뱃놀이터에는 1991년에 새긴 朝中邊境이라는 글자와 두만강이라는 한글이 새겨진 강둑의 담이 있고 주변은 두만강공원을 가꾸어져 있다.

 

 

 

 

 

 

해란강

너무나 유명한 가곡 선구자의 가사에 나오는 해란강... 하지만 선구자에는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사실이 숨어있었으니... 자세한 내용은 본 포스팅에서...

 

 

 

 

 

 

용두레우물

유구한 역사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 용정은 동남쪽으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함경북도와 마주보고 있으며 그 국경선의 총길이는 136km이다. 혁명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전통의 용정시는 연변에서 최초로 중국 공산당지부가 된 곳으로 한때 연변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는데 현재 조선족 총28만7천명중 66%정도가 모여살고 있다. 그 용정이란 지명의 기원인 용두레우물이다.

 

 

 

 

 

 

대성중학

1921년에 천도교계통의 동흥중학교와 유교 계통의 대성중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 이 두 학교는 300여명의 학생이 재학하였으며 교사와 학생들은 항일 민족해방 교육을 받았다. 일제는 이 두 학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1927년10월 용정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영사 경찰을 동원하여 이 두 학교의 교사들을 체포하자 학생들은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교에서는 애국가 권학가 학도가 등 가곡과 조선역사 조선지리를 열심히 가르쳤다. 윤동주시인을 배출한 학교로서 운동장에는 윤동주시비가 서 있다. 

 

 

 

 

 

 

윤동주생가

윤동주 생가에서 해질 무렵에 바라본 하늘의 모습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가 바라본 하늘의 모습이 이러했기에 그렇게도 아름다운 시를 탄생시켰으리라. 이제 더이상 그의 이상인 하늘과 별의 만남을 바람이 방해하지 않기를...

 

 

 

 

 

 

일송정

선구자는 과연 민족가곡일까? 갑작스레 "황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글자 하나만 바꿔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로 개작한 시인이 생각난다. 친일시비와 함께 조두남 기념관을 개관한 마산시의 한심한 작태를 비난하는 포스팅을 준비중이다.

 

 

 

 

 

 

청산리 항일 대첨 기념비

1920년 10월21일 김좌진장군이 지휘한 대한군정서 독립군이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 직소택 계곡에서 독립군 토벌을 위해 침입한 일본군 동지대 소속의 산전연대를 크게 격파한 전투를 기념하여 설립한 기념비

 

 

 

 

 

 

백두산 북파 등정

백두산천지로 향하는 가장 쉬운 등반로이다. 하지만 우리 일행이 이곳에 도달했을때는 기온이 무려 영하 25도까지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우리 일행을 마지막으로 등반이 차단되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상황에서 한시간가량이나 촬영을 감행했다. 일행중 두명은 코에 고드름이 얼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칼데라호인 천지는 중국과 북한의 경계 호수이며 주위 산봉우리들의 해발고도는 2,500m이상이고 수면의 해발고도는 2,189m이다. 화구벽은 경사가 아주 급하여 대부분 절벽으로 되어있다. 물의 깊이는 평균 214m이다. 그리고 송화강의 발원지이다.

 

 

 

 

 

 

백두산 서파 등정

북파를 등반한 다음날 우리 일행은 서파를 통해 다시 한번 백두산에 올랐다. 멀리 보이는 백두산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전날 폭설로자동차가 원래 정차하는 곳보다 1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한시간정도의 트레킹을 하니 엄청난 계단이 눈앞에 나타난다. 계단의 갯수가 무려 1246개라고 한다. 그 엄청난 계단을 오르니 3대가 덕을 쌓아야 볼수 있다는 천지가 또 다시 내눈앞에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이틀연속 천지를 보니 도대체 난 몇대에 걸쳐 덕을 쌓은 것일까? 좀 더 다가가서 멋진 각도로 천지의 모습을 담고 싶었으나 강풍에 날아갈까 두려워 더 이상 접근할수가 없었다. 이 사진은 1/250의 셔속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구름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강한 바람이 불었는지를 짐작할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금강대협곡

금강대협곡은 백두산이 화산폭발을 일으킬 때 용암이 흐르던 자리가 오랜 세월 풍화에 씻겨 이루어진 것이다. 협곡의 크기는 평균120m이며 깊이는 평균 80m이고 길이는 10km나 된다.


 

 

 

 

 

환도산성

집안 시내에 있는 국내성이 평지 산성이라면 환도산성은 전시에 왕과 백성들이 들어가 적군과 대치할 수 있게 쌓은 산성이다. 유리왕 21년(서기3년)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며 위나암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환도산성은 천연의 산봉우리와 산등성이를 이용하여 쌓은 성벽으로 밖으로는 험준한 절벽이고 안으로는 비교적 넓은 비탈을 안고 있다. 말발굽이나 활의 모양을 하고 있는 환도산성은 자연조건을 충분히 이용한 고대 고구려 축성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국내성

삼국사기에 유리왕22년(서기3년) 겨울 10월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 국내성은 졸본성에 이어 고구려의 제2수도였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성벽의 높이가 7~8미터에 이르렀다 하나 지금은 1미터정도만 남아있다.

 

 

 

 

 

 

 

장군총

장군총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의 용산 또는 토구자산에 있는 대표적인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이다. 장군총은 기단 계단식 석실 적석총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화강암으로 만든 7층피라미드형 축조물이다. 쌓아올린 장대석들은 모두 1,100여개에 달하며 돌의 크기는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으나 대략 제1층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작아진다. 정상부는 석회와 자갈을 섞어서 돔형으로 둥글게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제1층의 각 면의 적석이 밖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높이 약5m 가량의 호분석을 각면에 3개씩 기대어 세웠는데 북쪽면의 한 개가 없어져서 모두 11개가 남아있다. 장군총은 장수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한음식점 묘향산

국내성 동벽옆에 위치한 북한요리음식점에서 복무원동지와...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정부의 대북강경책이 얼마나 잘못된 정책인가를 깨달았다.

 

 

 

 

 

 

광개토대왕묘

광개토대왕묘로 추정되는 돌무지무덤... 일반에게 개방하지 않아서 철망넘어 볼수밖에 없었다.

 

 

 

 

 

 

광개토대왕비

태왕비는 태왕이 죽은 뒤 만 2년째 되는 서기 414년, 즉 장수왕 3년 9월에 태왕의 능과 함께 건립되었는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잊혀졌다가 1100여 년이 지난 1880년에 기적적으로 발견된다. 한때 세간의 관심을 뜨겁게 달구었던 재일 역사학자 이진희에 의한 태왕비 조작설에 대해서는 본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국동대혈

고구려의 제천행사인 동맹을 지내던 장소이다.

 

 

 

 

 

 

하고성자

졸본의 평지성이 남아있는 장소로 가는 길은 이렇듯 주택이 막고 있었다. 집주인의 아량에 의해서만 우리의 졸본성의 흔적을 볼수 있는 장벽에 가로막혀 결국 졸본의 평지성은 볼수가 없었다

 

 

 

 

 

 

오녀산성

환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오녀산성은 고구려 최초의 도읍지로 알려진 졸본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환인분지의 해발 800m쯤 되는 산지에 축조된 오녀산성은 남북 약1km, 동서는 약300m의 비교적 큰 성으로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3~6m이다. 이 부근에는 적석총을 비롯하여 많은 고분들이 남아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처음 쌓은 성이라는 것이 국내외 학자들의 주장으로 고구려의 첫 수도 紇升骨城(흘승골성)이라는 곳이다.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에 의해 간추려 보면 "추모왕이 엄리대수를 건너 첫 도읍을 세운 곳은 홀본 (졸본)인데 홀본은 비류골에 있고 서쪽 산위에 성을 짓고 도읍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오녀산성은 천혜의 요지다. 반대쪽에서 1200여개의 계단을 올라 또 이런 가파른 계단으로 내려갔다. 아래 사람들의 모습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본계수동

이동중 머리를 식히러 들렀던 곳이다. 중국에서는 최대규모의 석회동굴이라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의 환선굴의 규모가 더 큰듯하다. 석순이나 종유석의 모습을 보면 환선굴에 비해 생성연도가 느린것으로 추정된다. 환선굴이 훨씬 아름답니다.

 

 

 

 

 

 

연주산성

요동성에서 태자하를 따라 20킬로미터 상류로 올라가면 강가에 연주성이 있는데 대부분 학자들이 고구려때의 백암성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영양왕3년 (서기547)가을 7월에 개축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어 547년 보다 훨씬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나 언제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산을 의지하고 강가 절벽은 깎아지른 듯 하고 나머지 면은 10여미터나 되는 돌벽으로 되어있다. 현재 있는 서문터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올라간 성벽은 지금까지 압록강 이북에 남아 있는 고구려 성벽 가운데서 가장 견고하고 웅장하다. 이 직선상의 성벽에는 밖으로 3개의 雉(치)가 완벽하게 남아 있다.

 

 

 

 

 

 

북한식당 평양관

심양의 북한식당 평양관에서의 공연모습이다. 묘향산의 공연보다 훨씬 세련되었으나 오히려 감동은 덜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우리 식탁 뒤쪽에 앉았던 사람들이 북한의 고위층이었다고 한다.

 

 

 

 

정통 평양냉면이다. 육수는 필동면옥의 육수의 맛과 유사했고 면발은 서울에서 먹던 평양냉면의 면발과는 완전히 달랐다.

 

 

 

 

 

 

북릉공원

누르하치의 8번째 아들 홍타시의 무덤이 있는 공원이다. 안타깝게도 공사중이라 내부를 볼수는 없었다.

 

 

 

이번여행이 더욱 좋았던 것은 노옵션 노쇼핑이었다는 것이었다. 큰마음 먹고 떠난 여행이 가이드의 배를 채우기 위해 쇼핑센터나 전전하는 여행이 되는 경우가 많고, 뭐 쓸만한거 하나 하려면 계속 추가비용이 들어서 기분이 상하는 경우가 허다했었는데, 이번 여행을 주관한 여행사 산이 좋은 사람들은 여행에만 전념할수 있는 좋은 여행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특히 현지 가이드님은 한국어에 너무 능통해서 우리의 농담까지 완벽하게 이해하는 정도여서 여행이 끝날때가 되어서는 가이드라기 보다는 함께 여행하는 동료의 느낌이 날 정도였다.

 

주관 여행사: 산이 좋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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